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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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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양 조씨는 조선 시대 세도 가문 중 하나로, 신 안동 김씨, 여흥 민씨와 함께 권력을 다투었다. 시조는 조맹이며, 5명의 종묘배향공신과 2명의 영의정을 배출했다. 효순왕후와 신정왕후를 배출하여 왕실과도 깊은 관련을 맺었다. 1834년 안동 김씨로부터 실권을 장악했으나, 조만영의 사망 이후 다시 안동 김씨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이후 헌종 시기 천주교 박해와 신정왕후의 섭정을 거치며 흥선대원군에 의해 세도 정치가 축출되었다. 풍양 조씨는 호군공파, 회양공파, 금주공파, 평장사공파, 상장군공파의 3계 5파로 나뉘며,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를 본관으로 한다. 주요 인물로는 조현명, 조인영, 조만영 등이 있으며, 근현대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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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 조씨
기본 정보
풍양 조씨의 종문
풍양 조씨의 종문
한자 표기豐壤 趙氏
로마자 표기Pungyang Jo clan
유형씨족
국가한국
지역경기도 남양주시
시조조맹
연결된 인물효순왕후
조엄
조만영
신정왕후
조문명
귀인 조씨
조상경
웹사이트풍양 조씨 대종회
관향 및 집성촌
관향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집성촌황해남도 해주시, 안악군
강원도 춘천시
경기도 포천시, 양주시, 화성시
충청남도 아산시, 부여군, 서천군
경상북도 상주시
전라남도 강진군
인구 및 주요 인물
2015년 인구124,262명
주요 인물조현명
조지겸
조재호
조경
조만영
조병현
조정구
조인영
조남수
조광희
조기송
조남욱
조문기
조남기
조대연
조중연
조순
조동윤
조중구
조완구
조정구
귀인 조씨
효순왕후
신정왕후
추가 정보
중시조조지린(趙之藺)
조신혁(趙臣赫)
조보(趙寶)
관련 링크풍양조씨 대종회
풍남조씨참판공파 홈페이지
풍남조씨한산군파종중

2. 역사

풍양 조씨는 (구) 안동 김씨, 여흥 민씨와 함께 조선 후기 권력을 쥐었던 세 가문 중 하나로, 종묘배향공신 5명, 영의정 2명(조현명, 조인영)을 배출하였다. 관련 유적으로는 상주 오작당, 상주 양진당, 상주 청간정이 있다.

2. 1. 시조 및 기원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은 영해(현 경상북도 영덕군)지방 전투에서 신라군에 참패를 당하여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 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 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여 세였다. 이때부터 신라 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1]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견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1]

조맹은 조지린(趙之藺), 조신혁(趙臣赫), 조보(趙寶) 등의 후손을 두었다. 그의 세 후손은 결국 그를 풍양 조씨의 시조로 만들었다.[1]

2. 2. 분파

풍양 조씨는 시조 직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몇 세대가 지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손 천화사전직(天和寺殿直)을 지낸 조지린(趙之藺)을 계조(系祖)로 하는 호군공파, 회양공파, 금주공파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조신혁(趙臣赫)을 계조로 하는 평장사공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조보(趙寶)를 계조로 하는 상장군공파로 총 3계 5파가 있다. 각 계(系)는 서로 촌수를 가릴 수 없어 항렬을 따로 사용한다.

  • 전직공계(殿直公系) - 조지린(趙之藺)
  • * 호군공파(護軍公派) - 조사충(趙思忠)
  • * 회양공파(淮陽公派) - 조신(趙愼)
  • * 금주공파(錦州公派) - 조임(趙𥙛(示+任))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 조신혁(趙臣赫)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 조보(趙寶)
  • * 이 파는 관향을 강진(康津←道康)으로 삼고 세종대왕 때 문신이자 조보의 8세손인 조주(趙注)를 시조로 하였으나, 정조 때 회양공파 후손인 조홍진(趙弘鎭)이 강진 현감으로 부임하여 호적을 살펴 조보가 조맹의 후손임을 확인한 후, 예조에 통보하고 임금의 재가를 얻어 풍양으로 환본(還本)하였다.

2. 3. 조선 후기 세도 정치

조선 후기 풍양 조씨 가문은 유력한 양반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학자 5명과 조현명, 조인영과 같은 영의정 2명을 배출했다. 또한, 효순왕후와 신정왕후를 배출했다.[2] 봉안군의 부인 의춘옹주와 양원군의 부인 문천옹주를 비롯하여, 영조의 후궁 귀인 조씨와 철종의 후궁 귀인 조씨 등 두 명의 왕실 후궁도 배출했다.

1834년, 풍양 조씨 가문은 안동 김씨로부터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선조 때부터 권력을 휘두르던 안동 김씨를 몰아냈다. 그러나 1846년 조만영의 사망과 함께 왕권은 다시 안동 김씨에게 돌아갔다.[4]

천주교에 반대하던 풍양 조씨 가문은 헌종이 안동 김씨 가문을 천주교에 너그럽다고 비난하며 박해를 가해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 3명을 죽였을 때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5][6]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정왕후는 섭정을 맡았다.[7]

풍양 조씨는 고종이 된 이명복이 당시 12세에 불과하여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이며, 섭정을 할 이하응에게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았다. 철종의 죽음 소식이 궁중에 뻗어있는 정보망을 통해 이하응에게 전해지자마자, 이하응과 풍양 조씨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귀족들의 인정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세자의 책보를 손에 넣었고, 이는 왕위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신정왕후에게 부여했다. 철종의 죽음이 알려질 무렵, 안동 김씨는 왕실 법률에 따라 책보가 신정왕후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무력해졌다.

대왕대비가 섭정에서 물러나자, 흥선대원군은 조씨 가문의 영향력을 축출했다. 이는 결국 명성황후의 개입으로 이어졌고, 명성황후는 왕실 정치에 개입하여 왕의 아버지와 그의 지지자들의 권력을 몰아내고 자신의 가문인 여흥 민씨의 권력을 가져왔다.

3. 본관

풍양(豐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의 옛 지명이다. 백제고구려에 속했을 때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라 불렸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황양(荒壤)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풍양으로 고쳐 양주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 포주(抱州 : 포천)에 이속되었다. 1427년(세종 9)에 다시 양주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에 양주군으로부터 신설된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하여 남양주시가 되었다.

4. 인물

4. 1. 고려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은 영해(현 경상북도 영덕)지방 전투에서 신라군에 참패를 당하여 휘하 장군들과 상의하였는데, 한결같이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 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의견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았을 때 나이가 70여 세였다. 이때부터 신라 정벌에 나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이라는 이름을 내렸다.[1]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견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고 있다.[1]

4. 2. 조선



인평대군의 사위 조기수(趙祺壽)[1], 영조의 후궁 귀인 조씨[2], 진종의 정비 효순왕후[3], 익종의 정비 신정왕후[4]등이 풍양 조씨 가문이었다.

풍양 조씨 세족은 조선 후기 유력한 양반 가문으로, 종묘 학자 5명과 조현명, 조인영영의정 2명을 배출했다. 효장세자의 왕비이자 추존왕후인 효순왕후와 효명세자의 왕비이자 추존왕대비인 신정왕후를 배출하기도 했다.

봉안군의 부인 의춘옹주[2]와 양원군의 부인 문천옹주[3], 영조의 후궁 귀인 조씨, 철종의 후궁 귀인 조씨 등 두 명의 왕실 후궁도 풍양 조씨 가문 출신이었다.

1834년 풍양 조씨 가문은 안동 김씨로부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선조 때부터 권력을 휘두르던 안동 김씨를 몰아냈다. 그러나 1846년 조만영의 사망과 함께 왕권은 다시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들어갔다.[4]

천주교에 반대하던 풍양 조씨 가문은 헌종이 안동 김씨 가문을 천주교에 너그럽다고 비난하며 박해를 가해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 3명을 죽였을 때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5][6]

효명세자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정왕후는 섭정을 맡았다.[7]

풍양 조씨는 고종이 된 이명복이 12세에 불과하여 친정(親政)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섭정을 할 이하응에게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았다. 철종의 죽음 소식이 궁중에 뻗어있는 정보망을 통해 이하응에게 전해지자, 그와 풍양 조씨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귀족들의 인정을 위해 필수적인 세자의 책보(冊寶)를 손에 넣었고, 이는 왕위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신정왕대비에게 부여했다. 철종의 죽음이 알려질 무렵, 안동 김씨는 왕실 법률에 따라 책보가 신정왕대비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무력해졌다.

대왕대비가 섭정에서 물러나자, 흥선대원군은 풍양 조씨 가문의 영향력을 축출했다. 이는 결국 명성황후의 개입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왕실 정치에 개입하여 왕의 아버지와 그의 지지자들의 권력을 몰아내고 자신의 가문인 여흥 민씨의 권력을 가져왔다.

4. 3. 근현대

4. 4. 현대

5. 집성촌

지역비고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2015년 기준 1,389명 (총인구의 0.45%)[9]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남면 죽리2015년 기준 349명 (총인구의 1.69%)[9]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낙동면 운평리2015년 기준 1,244명 (총인구의 1.34%)[9]
전라북도 군산시 신관동2015년 기준 1,939명 (총인구의 0.77%)[9]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2015년 기준 255명 (총인구의 0.78%)[9]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지토리, 장암면 상황리, 장암면 하황리2015년 기준 1,583명 (총인구의 2.5%, 전국에서 총인구 대비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9]
황해도 안악군 안곡면 장월리
평안남도 룡강군 양곡면 초두리[10]


6. 항렬자

호군공파, 회양공파, 금주공파 항렬자
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41세42세43세
동(東)口구(九)남(南)口연(衍)성(誠)口희(熙)용(鏞)口신(新)중(重)口규(揆)용(用)口원(元)상(商)口형(衡)무(茂)口범(範)강(康)口재(宰)종(鍾)口주(湊)



평장사공파 항렬자
17세18세19세20세21세22세23세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41세42세43세44세45세46세47세48세49세50세
만(萬)口년(年)희(熙)口재(載)돈(敦)口묵(默)병(柄)口기(紀)강(康)口규(揆)연(演)口행(行)진(振)口동(東)순(淳)口경(卿)기(祺)口성(成)창(彰)口중(重)연(縯)口직(稙)범(範)口용(鏞)승(承)口욱(旭)녕(寧)口무(茂)재(宰)口정(程)태(兌)口우(宇)건(建)口보(輔)



상장군공파 항렬자
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41세42세43세
갑(岬)口일(日)병(昺)口종(宗)성(晟)口기(玘)강(慷)口상(庠)성(聖)口채(蔡)진(陳)口건(乾)천(遷)口정(正)무(武)口회(回)용(庸)口신(薪)영(郢)口규(葵)


참조

[1] 서적 Korea At The Crossroads https://books.google[...] Happyreading 2007-04-20
[2] 문서 The second son of King Seongjong and Royal Consort Gwi-in of the Chogye Jeong clan (? – 1504)
[3] 문서 The youngest son of King Seongjong and Royal Consort Suk-yong of the Cheongseong Sim clan (숙용 심씨) (1465 - 1515). Sim was a first cousin of Queen Soheon
[4] 서적 Korean Landscape Painting: Continuity and Innovation Through the Ages https://books.google[...] Hollym International Corporation 2006-00-00
[5] 서적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Jimoondang 2005-00-00
[6] 서적 Religion in Korea: Harmony and Coexistence https://books.google[...] Seoul Selection 2015-08-31
[7] 서적 Seoul: A Field Guide to History https://books.google[...] Dolbegae Publishers 2007-00-00
[8]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6
[9] 웹사이트 본관분포 https://sgis.kostat.[...] 2023-02-24
[10] 웹사이트 조씨(趙氏) 본관(本貫) 풍양(豊壤)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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